독서노트

2019. 10. 4 슬픔이여 안녕

merciel_ 2019. 10. 13. 16:56

나는 누구보다도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인 다음과 같은 간결한 표현을 곧잘 되풀이하곤 했다.
'죄악이란 현대사회에서 존속되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색채의 주석이다.'
나는 이 말을 실행에 옮겼을 경우보다 더욱 확실하게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내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인생이 이 문구를 흉내내고 여기서 영감을 얻어내며, 에피나르의 악덕한 이미지처럼
무엇이 솟아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침체한 시간이나 단절이나 일상적인 선한 감정들을 잊고 있었다.
이상적으로 나는 비열하고 파렴치한 삶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다른 것에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일에도 집착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안느는 나를 생각하는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나는 그녀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긴급하고도 우선적인 일처럼 여겨졌다.
나는 기회가 이렇게도 빨리 내게 주어지리라는 것과 그 기회를 잡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기야 한 달 후에는 그런 사건에 대해서 다른 의겨을 갖게 되리라는 것과,
내 소신이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처음으로 나는 이 이상한 쾌락을 알게 되었다. 즉 한 인간을 꿰뚫어보고 그를 밝혀내며,
밝은 곳으로 데리고 나가 거기서 그를 명중시키는 쾌락을, 조심스럽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곧 방아쇠가 당겨졌다. 명중! 나는 이런 것을 알지 못했었다.
나는 언제나 너무 충동적이었었다. 내가 한 사람의 인간을 적중시켰을 때는, 그것은 무심코 한 일이었다.
인간의 반사작용인 이 온갖 황홀한 메카니즘을, 이 온갖 언어의 힘을 나는 갑자기 막연하게 예감한 것이다.
그것이, 환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웠던지.
언젠가 나도 누군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로 향하는 하나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 Bonjour Tristesse, Françoise Sagan, 1954

 

처음에는 <Adieu, Tristesse! - 빠빠이 슬픔> 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Bonjour, Tristesse! - 안녕(하세요), 슬픔!> 이어서 솔찬히 놀랐던 기억이 있는 사강의 데뷔작.

어떠한 책을 읽는 언제 읽느냐에 따라 느끼는 것과 이해도는 분명 다를 것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사유하는 의미에서보다 욕심때문에 소화하지도 못할 양/내용을 꾸역꾸역 읽곤 했다.
그 시기에 내가 읽었던 사강의 첫 작품.
기대를 많이 하고 읽었었는데, 그리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은 없다.
최근 다시 읽고보니 여전히 미묘한 프랑스 갬성은 있지만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여운이 남아 재밌던 책.
인생사 타이밍인 것 처럼, 어떠한 책을 읽는 것도 타이밍인 듯 하다.
슬픔이여 안녕, 2019년 가을의 내게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거니?